내가 파리를 볼 때 갖는 느낌 중 하나는 바로 '색깔'이다. 각 구역별로 그 색깔이 지정되는데, 이를테면, 씨떼(cite)섬 주변의 파리 중심부는 베이지색, 잠깐 살았던 12구, 뱅센숲(Bois de vincennes)과 미테랑 도서관이 가까운 그곳은 고동색, 친구가 살고있던 스탈린그라드 역 주변은 검은색, 신개선문(Grande arche)이 있는 라데팡스 지역은 회색, 학교가 있던 라틴 지구(Quartier Latin)는 흰색, 한국문화원이 있던 트로꺄데로(Trocadero)역 주변은 초록색, 사르트르가 노닥거리던 생제르맹 데프레(Saint Germain des Pres)는 엷은 하늘색... 이런 색깔형 느낌은 아마 거기 있는 건물이나 공원등에서 얻은 단순한 인상이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인 것 같다.

출처 : http://www.yeonhak.com/1?TSSESSION=5479202f7e61077e65abaed92034b17c

그런데 그 중에 여러색깔이 한꺼번에 인지되는 그런 구역들이 있다. 바로 몽마르뜨(Montmartre)와 몽파르나스(Montparnasse) 지역이다. 몽마르뜨는 무채색계열 속에 원색계열이 잘 녹아들어간 지역으로, 몽파르나스는 원색계열 속에 무채색계열이 잘 녹아들어간 지역으로 인식된다. 이 두 지역은 지하철 4호선이 남북으로 이어주고 있다. 4호선은 파리를 큰 원이라고 볼 때 남북을 가로지르는 지름선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 두 지역의 역사를 대강 알고나서였다. 몽마르뜨는 피카소 등이 살던 전형적인 예술가 동네였다. 인상주의와 그 이후를 고민하던 사람들은 몽마르뜨의 카페에 모여 그들의 삶과 예술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대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하철이 생긴 후 그들은 남하하게 되었다. 큰 기차역(Gare Montparnasse), 사교, 정치적 논쟁, 예술적 논쟁들이 태동되던 카페들도 몽파르나스에 있었고, 아마 그들은 자연스런 기술적 발전에 조우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자연스런 이동의 결과는 현재 몽파르나스에 있는 예술가들의 아뜰리에가 보여주고 있다.

지하철은 아직도 파리지앙의 삶의 한켠을 지배하고 있다. 내가 들은 우스갯소리 하나도 그 점을 충분히 반영한다. '파리지앙의 생활을 세 단어로 말하면? 지하철(metro), 일(boulot), 잠(dodo)' (불어로는 운이 맞는 세 단어). 꼭 NEXT의 '도시인' 가사를 읽는 느낌 아닌가. 지하철을 타면 적어도 파리 전역은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14호선까지 있는데다가 일종의 그물 같은 형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지하철 준설 당시 어디서든 도보로 5분 이내 거리에 지하철 역을 두는 형태를 원칙으로 삼았다 한다. 거기에 더해 버스와 RER(광역열차)까지 하면 사람들의 행동 반경은 엄청나게 넓어진다. 파리의 버스, 지하철, RER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여있다. RATP라고 하는 하나의 공기업이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리의 대중교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특징을 보여준다. 바로 '공공성'이다. 대중교통은 공공의 편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공공성에 의해 이윤이 심각하게 희생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통 요금은 일년에 한번씩 오른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주 오르는 편이다. 그러나 그 체감 인상폭은 그리 크지 않다. 한달 정기 패스 가격이 한번 오를 때 1유로이하로 오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직장에서는 교통비 보조금까지 나오기 때문에 파리지앙의 한달 교통 요금을 대강 추정해봐도 40유로(한화 6만원)이하이다. 딱히 소외되는 지역이 없이 대부분의 지역을 싼 대중교통으로 이용가능한 것이다. (물론 정기권을 사지 않은 관광객들에게는 결코 싸지 않을 수 있다)

또다른 특징은 대중교통에 대한 접근이 '평등하다' 는 것이다. 특히 장애인의 이동권이 잘 보장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좌석버스를 중심으로 저상버스가 도입되고 있는데, 파리의 버스는 전부 저상버스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버스를 타거나 내릴 때는 뒷문이 열리기 전 경고음과 함께 판자 하나가 버스로부터 나와서 인도에 걸쳐진다. 그러면 휠체어는 아주 부드럽게 미끄러져 안으로 들어오고 휠체어를 위해 비워둔 버스 중간의 자리에 주차한다. 그 자리 벽면에는 휠체어를 탄 이가 바로 누를 수 있는 하차벨이 있다. 임산부는 버스에 타면 무조건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개인의 양심에만 기대야 하는 한국과 달리 '사회적 합의'를 통해 형성된 문화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기사가 나서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도록 종용한다. 실제 버스에 타보면 '좌석 우선순위' 라고 하여 자그마한 팻말이 붙어있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상이군인, 임산부 등에 우선순위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평등'한 접근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은 '천천히'에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장애인이 타고 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적어도 30초에서 1분이다. 한 정거장에서 한 사람을 위해 1분을 소비하는 것, 한국사람들은 동의할 수 있을까? 승차권을 미리 구입하지 못한 사람도 버스에 탈수 있다. 기사에게 승차권을 사는 것이다. 그 과정은 적어도 20초에서 1분이다. 임산부가 타고 자리에 앉기 전까지 기사는 출발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적어도 30초에서 1분이다. 결국 세사람이 최대 3분을 소비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들이 동의할 수 있을지 정말 의문이다. 게다가 배차간격을 칼같이 지켜야 하는 기사의 입장에서도 역시 이 점은 쉬운 일이 아니게 된다. 배차간격은 기사들과 배차효율성의 문제이고,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자주 버스가 오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들쭉날쭉한 파리의 버스의 배차간격, 우리는 과연 이런 간격을 수용할 수 있을까? 차가 막히면 한국의 버스는 중앙선침범까지도 마다않고 달린다. 그러나 파리의 버스는 버스전용차선(나즈막한 돌로 분리된)에서 달리는데, 그 차선은 자전거도로이기도 하고, 또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차가 지나다니는 길이기도 하다. 20m를 가는데 10분이 걸릴 때도 있다. 이런 느릿느릿함, 우리는 받아들일 자세가 되었을까?

파리는 이런 점을 꽤 묘하게 풀어냈다. 정확한 시간을 지켜야 할 경우에는 지하철, 그렇지 않아도 될 경우에는 버스를 타면 된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RER은 가능하다. 엘레베이터가 잘 갖춰져 있다) 그러나 버스에 있어서는 무조건 이용이 가능한 것이다. 지하철과 버스가 상호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독자적으로 그물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으면 이용자는 편의에 따라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파리의 대중교통 역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파리에 지나치게 자원이 집중되어있는 편이어서 다른 ile-de-France(한국으로 따지면 경기도?)지역에서부터 파리로 들어오는 형태의 집중형 노선을 보여주고, 이것은 수도 집중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또한 오래전에 지어진 지하철 역사와 낡은 차량 때문에 환기시설이 미비해서 지하철을 타면 열려진 창문으로 지하의 공기와 함께 숨쉬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대중교통에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지속적인 변화를 꾀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지속가능성과 느림의 미학을 세련되게 잘 구현한 예가 2006년말, 2007년에 등장했다. (궁극적인 해결은 아니라 일종의 타협점이라고 보지만.) 2006년 12월에는 파리 남쪽 경계를 따라 Tramway 라고 하는 전철이 생겼다. 원래는 같은 경로를 PC1이라는 버스가 담당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다보니 버스 내부는 늘 복잡하고 그 불편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tramway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 최대 속도를 낼 때도 60km/h 정도이고, 평소 운행 속도는 30km/h 정도다. 또한 선로 주변은 잔디가 심어져 있어 보기에도 좋은 편인데다가, 소음이 적고, 전기를 이용하다보니 온실가스를 배출할 일도 없다. 또한 2007년에는 velib라는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velo(자전거)와 liberte(자유)의 합성어 velib은 자전거 무료 대여 시스템이다. 파리 시는 이 서비스를 한 회사에 맡겼는데, 광고서비스에 대한 이윤을 회사가 전부 가지는 댓가로 공짜로 설치 및 운영을 맡길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곳곳에 설치된 velib 포인트에 자전거가 전자식으로 묶여있고, 이용권을 ATM 기기같이 생긴 기계에서 결제하면 원하는 자전거가 풀려나는 형태이다. 1일 이용권은 단지 1유로(현재 한화 1600원), 정기권을 끊으면 처음 30분은 무료, 그 후부터는 추가과금이 되는 형태이다. 파리 시의 교통카드인 NAVIGO로도 결제되기에 파리 시민들에게는 무척 편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파리시의 반지름을 가로질러도 30분 정도가 되는 정도의 거리이므로 이 30분 과금시스템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편리하다. 물론 이 시스템은 여전히 문제거리를 안고있다. 자전거의 도난, 자전거와 자동차의 충돌 사고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나 일종의 교통문화적 관점에서는 충분한 역할을 해 낼수 있고, 운영 문제는 따로 해결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아직 한국의 자전거 도로 상황이라든가, 자전거에 대한 자동차 운전자의 태도, 도시의 크기 면에서 도입 시에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운영상의 문제를 예로들어 이런 시스템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인색하다는 사실은 안타까울 지경이다.

글머리에서 밝혔듯, 대중교통은 단순히 교통수단의 공공화 정도의 의미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차지했듯, 대중교통 시스템의 섬세한 디자인은 문화적인 변화, 사회적인 변화, 그리고 대중의 삶 자체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에 해당한다. 이런 것에 기초해서 필자는 조심스레 '대중교통'이 아닌 '민중교통'이란 개념을 제안코자 한다. '대중교통'이 이야기하는 바는 '대중'과 '교통'이 분리되어 '교통은 대중의 이동에 도움을 준다'는 식의 소극적인 개입, 소극적인 변화만을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민중교통'은 교통의 주체와 소유권을 '민중'에게 주고, 교통으로 인해 생기는 기저의 변화가 '민중'에게 영향을 주는 형태로 좀 더 밀착되고 좀 더 활발한 상호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이 '어느 정도의 경제력에 다다르면 자가용은 필수' 와 같은 명제가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현재를 합리적인 미래로 바꿔갈 수 있는 첫걸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 김태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