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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명호
Date : 2005-04-28 13:47 | Hit :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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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어느덧 모스크바에 온 지도 두 달이 지나갑니다.
지난 주까지는 기온이 영하였고 눈까지 왔었는데, 이번 주부터는 봄 기운이
완연히 납니다. 저는 파견 기간이 7월 중순까지 연장이 되었습니다.
일을 제대로 못해서 잘 할때까지 하라는 군요 ^^;
7월 중순에는 들어갈 것 같습니다. 계획이 새로 새워지면서 제 뒤에 파견될
사람까지 지정이 되어 있거든요. 저로서는 겨울에 다시 나오는 것보다는
여름까지 계속 있는 게 여러가지로 좋겠다 싶어서 3개월 연장을 신청했습니다.
이제는 생활하는 것과 업무하는 것이 안정적이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잘 몰랐는데, 기압이 낮은 게 사람을 쉽게 피곤하게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게 되어서 몸 컨디션 조절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이쪽은 년 평균 기압이 1기압 미만일 정도로 항상 저기압입니다. 저기압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 평소 체력의 80% 정도밖에 못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에서 지내는 것처럼 컨디션 조절안하고 살면 금방 피곤해지는 거죠.
잠은 반드시 5-6시간은 꼭 자야하구요, 술먹으면 다음날은 완전 꽝입니다.
이네들은 이런 곳에서 생활하는 게 익숙해져셔인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정말 철저하게 체력 관리하지 않으면 쉽게 지치게 되는 곳이 이 곳입니다.
게다가 기온이 낮으니 에너지 소모는 더 큽니다. 체온을 뺏기는 게 사람의
활력을 얼마나 떨어뜨리는 지도 여기와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4월 초쯤 되어서야 날씨도 조금 풀리기도 하고 이곳에서 컨디션 조절하는 요령도
생기면서 적응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려인 아주머니께 러시아어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도 4월 초쯤
부터이군요. 마가리타라고 하는 분이신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국이 고향이고
연해주에서 결혼해서 아버지를 낳으셨다는 군요. 그리고 1930년대 초에 스탈린의
한인 이주 정책 때문에 타슈켄트로 와서 한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마가리타 선생님은 나이가 좀 있으신 편인데, 1976년에 모스크바에
오셨다고 하더군요. 형제들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답니다.
역사책에서 읽었던 전형적인 러시아내 고려인의 삶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어는 조금 하시는데, 한국 유학생들을 많이 가르쳐 보셔서 인지,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러시아어를 시작해야 하는 지를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제 러시아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7월 귀국할 때까지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그 나라를 잘 알게 되는 건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고 그 나라 사람들을
사귀면서 부터인 것 같습니다. 연구소 일이 워낙 많고 카운터 파트너와는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해서 러시아어를 배울 틈을 못내고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러시아어
공부를 시작하니 이제 제대로 모스크바 생활을 하는 느낌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이네들과 일하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생전에 이처럼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들은
처음 봅니다.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는 건 괜찮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과 연관해서 이네들과 협력을 한다고 하면 아마 속이 터지고 열불이 나서
수명이 한 10년은 단축될 겁니다. 스탈린의 국가사회주의는 각 개인의 행동 양식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발성, 이런 단어는 이네들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구요. 제가 보기에는 정치행위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얘네들은 일 할 때 문제가 생기면 첫번째
하는 말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입니다. 그 다음에 이네들에게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은 '미안하다'입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가시죠?
하도 궁금해서 모스크바에서 10년 이상 살아온 유학생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한국에서와 같은 시민사회단체가 있느냐? 혹시 대학에 써클은 있느냐?
대답은 NET입니다. 한국에서와 같은 시민사회단체는 본 적이 없다. 대학에는 써클이 없다.
써클 만들면 잡혀갔답니다. 대학이든 대학원이든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처럼
빡빡한 커리큘럼에 교수의 권위는 엄청 높은 것 같습니다. 학생의 선택권 같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체육 써클이나 딴따라 써클 같은 것도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딱 한군데 딴따라 써클이 있는 곳이 있답니다. MAI라고 하는 종합이공계대학인데
워낙 학교가 큰 바람에 학교에 비해 입학생 수가 적어져서 시험을 안쳐도 입학할 수
있도록 하고 들어온 학생들에게는 밴드를 결성할 수 있는 것을 허락했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밴드 써클이 있답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 중에서 MAI 출신이 꽤 많아서
때때로 토크쇼 같은 곳에서 사회자가 전공 같은 걸 물으면 가스 터빈 전공이라는 둥 하는
때가 있답니다. 하여튼 대학생들에게도 자유로운 써클 활동은 거의 없는 거죠.
그리고 의외로 사회나 사상 같은 분야에 관심이 없답니다. 인문 전공하는 분야도 있을 텐데
그러냐고 했더니 직업으로서 학문으로서 관심이 있을 뿐, 그것을 국가와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고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군요. 러시아의 대학은 국가사회주의 체제에
복무하는 지식인 계층을 충원하기 위한 것이었나 봅니다. 러시아의 대학에서 비판적 지식인이란
개념은 혁명이후에 사라진 것 같습니다. 오로지 기능적인 지식인만 남은 것 같습니다.
개별적인 분과학문에서는 높은 수준에 오른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와 관점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아직 제가 러시아 생활을 많이 안 해서
그럴지도 모르죠. 저도 떠나기 전에 모스크바에서 가장 진보적인 시민단체, 노동조합,
학생모임을 한 번 만나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5월 2일에 모스크바 한인 유학생
체육대회가 있다고 하니 한 번 가볼까 생각중입니다.
한국에는 봄꽃이 피고지고 하고 있겠군요. 여기는 산을 보려면 남쪽으로 1000km를 가야된
답니다. 저는 부산에서 성장하다 보니 항상 근처에 조그마한 언덕이 있는 곳이 아늑하게
느껴지고 좋은 데, 여기는 너무 황당합니다. 그나마 녹지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그렇지
북경처럼 녹지 조성도 안되어 있는 그런 동네라면 정말 지내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5월부터는 호텔에서 아파트형 숙소에서 지내게 됩니다.
호텔에서 장기간 머문다는 건 여러가지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도 제가 자꾸 이야기를 해서 가까스로 이루어졌습니다. 말로만 연구원들의 복지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실제로는 장기파견에서 생길 수 있는 생활에서의 문제, 개인적인
적응의 문제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이번에 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일단 3개월은 집같은 곳에서 살게 되어 다행입니다.
넓기도 훨씬 넓고 주위 환경도 좋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사진 찍어서 홈페이지에
올리겠습니다. 이사를 가면 자전거를 하나 구입할까 생각중입니다. 저희 사업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 10년은 모스크바를 왔다갔다 할 것 같기도 하고, 시 전체가 평평해서
자전거 타기에는 딱이거든요. 돌아다니기도 좋구요. 귀국할 때는 파견나오는 사람들에게
'강매'하면 되니까 여러가지로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3개월 파견 기간을 교체해서 연장하기로 했다니까 연구소 동료들은 거기서
러시아 제부슈까를 만나고 있느냐는 둥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군요.
아직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데 말이죠. 러시아 어를 어느정도 익히게 되면
러시아 여자 친구라도 함 만들어 볼까요? 좋은 소식 기다리세요 ^^;
이번주와 다음주는 SDR이라고 하는 설계 검토 때문에 좀 분주한 편입니다.
일이 잘 되어야 할 텐데 말이죠. 틈나는 대로 모스크바 생활하는 소식을 올리겠습니다.
아름다운 한국의 봄을 만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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